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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된다. 따라서 이 보고서의 결과는 평양의 소련군정 주도로 북한정권 창출을 위한 ’민주개혁 조칼들이 숨 가쁘게 진행된다. ▶ 소련공산당, 서울총영사에 “여운형에 대해 보고하라”긴급 지령 1945년 10월 5일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 폴리안스키는 “여운형에 대해 긴급 보고하라”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긴급지령을 받고 평양의 소련군정을 통해 여운형의 신상정보와 정치적 성향 등을 상세히 보고한다. 이 보고서는 극동군총사령관을 비롯 소련군 고위지도부를 거친다. 이상.. 마지막. 02편에서 계속~~ 필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의 캠퍼스 생활을 다루려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했다. C 분대장은 졸업 후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배치돼 현재까지도 김정은의 지근거리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더 놀라운 점은 C 분대장의 결혼 상대다. C 분대장의 현재 부인은 바로 현송월 모란봉악단 단장이다. 한때 김정은의 내연녀라는 설이 나돌기도 했던 현송월의 남편이 다름 아닌 김정은의 직속 분대장이었던 C 분대장이었던 것. 김정은은 자신이 총애했던 두 남녀를 부부의 연으로 연결시켜줬던 것이다. 이 밖에도 김정은이 2005년 입대했을 당시 같은 중대 다른 소대로 몰래 배치된 세 명의 호위대원 역시 제대 후 김정은의 직속 호위부대원으로 함께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일단의 한인들을 소련정부는 북한통치에 투입했다. 이것은 물론 한국인이고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을 동원해 군정을 용이하게 운영하겠다는 행정적인 의도도 있었지만 그와 함께 장차 소비예트화할 북쪽의 지도자로 내밀하게 정한 김일성을 지원하기 위한 정치적인 사전준비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생활 경험이 풍부하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어서 해방후의 북한을 급속하게 장악,북한사회의 골격을 만들어냈다. 45년 8월 하순부터 46년 9월까지 북한에 파견돼 직·간접으로 김일성 정권을 도왔던



장면은 다 괜찮았는데 연결이 매끄럽지 않았어서 좀 거슬렸을 수도 있을 것 같아 ■ 소련군정, 1946년 2월 북조선에 ‘민주정권틀’ 세워 ▶신탁통치 문제로 조만식을 잃은 소련군정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도 빨치산 출신 최용건을 당수로 내세워 북조선 공산당의 제2중대로 전락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할까. 소련군정은 조만식이 없는 북한에서 김두봉을 얼굴마담으로 부상시킨다.



떠나지 않았냐고 화를 낸다. 윤세리가 떠나지 않음으로 해서 자신은 물론이고 부대원 모두가 위험을 감수하며 했던 일이 무산이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세리 덕분에 자신이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리정혁은 그에게 키스하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사실 은 현실적인 리얼리티의 관점으로 보면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물론 촘촘한 취재를 통해 채워진 북한의 일상들은 이미 귀순한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상당한 고증을 거쳤다는 게 확인되었다. 우리와는



‘민주기지’로 키워가려 했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은 ‘역사적인 지령’이라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조선을 점령하고서 1개월가량을 보낸 평양의 소련군정 사령부는 나름대로 북조선 정세를 파악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준비해 온 프로그램에 따라 차례대로 시스템화해 군정의 가닥을 잡아 나갔다. 김일성의 입북을 전후해 평양의 소련군정 사령부는 급박하게 돌아간다. 무엇보다 급한 일은 북조선에 위성 정권을 창출한다는 큰 틀의 전략 속에서 장차 북조선 정권을 이끌고 갈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아울러 소련의 위성 정권과 지도자





책임비서를 거쳐 현재는 당위원장을 역임하며 승승장구 중이다.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C 분대장이다. 한낱 시골 농장원이었던 그는 김정은의 배려로 자기의 평생소원을 성취했다. C 분대장은 군 제대 후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김정은은 C 분대장이 대학에 재학했을 시기(2010년 9월 공식 등장 전)에도 그를 몰래 찾아가 환담을 나누는 등 매우 가까이



혁명사업을 철저히 관철하겠다”는 등의 현란한 표현이 등장한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간략하게 대답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최용건은 88여단 내 조선인 중 직위가 가장 높아서 길고 자세하게 답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이 밖에 일설에는 “최용건이 김좌진 장군 암살(1930)의 배후”라는 설도 있으나, 이력서에는 관련 내용이 언급되지 않아 확인할





등을 맡은 최용건은 이력서에서도 단연 화려한 경력이 돋보였다. 최용건 은 ‘국내파’ 박헌영 초대 부수상 겸 외무상에게 직접 사형판결을 내린 뒤 1976년 사망 때까지 김일성에 이은 북한 정권의 2인자로 있었다.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최용건은 북한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공화국 차수(次帥)’를 맡은 적이 있다”며 “후임 차수들은 모두 ‘인민군 차수’에 불과하다”고 했다. 화려한 이력의 2인자 최용건 (위에서부터) 최용건, 김책, 안길, 서철의 중국어 수기 이력서. photo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1940년 12월 25일 작성된 그의 이력서는 또박또박한 한자로





지령한다. 소련의 의도가 드러난다. 이상.. 03편에서 계속~~ 근데 거실소파에앉혀서 송이버섯 차 줌ㅋㅋㅋㅋ 그때 현빈과 지금 현빈과 천지차이네요 그리고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은 공조에도 나오네요 총빼든 조철강 총상 이후 대충 지혈및 총알제거치료후 북으로 추방 리정혁과 5중대원 귀환 귀환후 총정치국장에 대한 책임추궁과 세리에대한 그리움으로 힘겨운 리정혁 그리고 그모습을 보며 같이 슬퍼 해 주는 5중대원들 만복동무는 직위해제및 불명예전역 구승준은 단이엄마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하지만 추방을 당하고 단이에대한 보위부조사가 임박하자 서로 전혀 상관이 없다고 보호해줌 이후 귀국한 구승준은 둘째내외에